1794년 가을, 한양. 사흘 전 깊은 밤.
0. 사흘 전, 그날 밤
창덕궁 편전엔 등잔 하나뿐이었다.
불꽃 하나가 겨우 방 한가운데를 밝히고, 그 너머 모서리는 먹을 쏟은 듯 어두웠다. 붉은 곤룡포의 넓은 등이 불빛을 가로막고 앉아 있었다. 익선관 아래 목덜미와 어깨선만 보일 뿐, 임금의 얼굴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낮은 서안 건너편에는 흰 도포 차림의 윤서겸이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있었다. 숨소리조차 죽인 자리였다.
곤룡포 소매 속에서 손 하나가 나왔다. 그 손이 서안 위에 누런 봉서를 내려놓았다. 그 위에 놋쇠 마패를 얹었다. 등잔 빛이 닿자 마패 위의 말 다섯 마리가 어른어른 달려 나올 듯했다.
“봉서에 적힌 곳으로 가라.”
낮고 짧은 한마디였다.
윤서겸이 두 손을 뻗어 봉서와 마패를 받들었다. 그대로 이마를 한 번 더 조아리고 무릎을 뒤로 물렸다. 물러나는 흰 도포 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그때였다. 곤룡포의 등이 아주 조금 숙여졌다.
짧은 숨이 방 안을 건넜다.
“…그 아이도 데려가거라.”
물러나던 윤서겸의 무릎이 멈췄다. 봉서와 마패를 받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어찌 아시는지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묻지 못했다. 등잔불만 가늘게 흔들렸다.
같은 밤, 한양 어딘가의 기와집 사랑채였다.
촛불 하나가 방을 밝혔다. 서가마다 낡은 책이 빼곡해 서고인지 사랑채인지 분간이 안 갔다. 검은 비단 도포를 입은 사내가 촛불을 등지고 앉아 낡은 실 장정 책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불빛이 등 뒤에 있으니 얼굴은 어둠 속이었다. 보이는 것은 도포 소매와 책장을 넘기는 손뿐이었다.
문밖 댓돌 아래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숨소리도 없었다.
“전하께서… 드디어 마패를 꺼내셨군.”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윤서겸이 남쪽으로 내려간다. …고개에서 끝내라.”
문밖의 그림자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게 물었다.
“…어사는.”
사내가 책을 덮었다. 덮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울렸다.
“기록에 없는 자다.”
그림자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댓돌 아래에는 달빛만 남았다.
사내는 한참 말이 없었다.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조용히 내려놓았다. 찻잔 바닥이 서안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이어 손가락이 촛불 심지를 지그시 눌렀다.
1. 엎드린 호방
“어… 어, 어사 나리!!”
그 외침이 주막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자,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끊겼다. 뚝배기 부딪치는 소리, 탁자를 두드리던 젓가락 소리, 장꾼들의 낄낄 웃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주막 전체가 얼어붙은 듯했다.
옆 탁자의 아낙이 숟가락을 든 채 굳었다. 그러더니 못 볼 것이라도 본 양 손바닥으로 제 아이의 눈을 덮었다.
“엄마, 왜…”
“쉿.”
흙바닥에는 호방이 엎드려 있었다. 방금까지 국밥값 세 닢도 못 내는 놈이라며 막동을 코웃음으로 내려다보던 바로 그 호방이었다. 갓이 비뚜름하게 돌아가 이마에 걸려 있는데 고쳐 쓸 엄두도 못 냈다.
그 앞 흙바닥에는 마패가 놓여 있었다. 놋쇠 낯짝에 말 다섯 마리가 새겨진 그것이 한낮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호방이 엎드린 채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마패를 조심스레 집었다. 소매로 박박 닦았다. 묻은 흙을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닦고, 들여다보고, 또 닦은 뒤에야 두 손으로 머리 위까지 받쳐 올렸다.
막동은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 품에 찔러 넣었다.
그 순간 막동의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윗사람이 엎드리면 같이 낮아지던 하인 몸의 버릇이다. 무릎이 반쯤 굽혀지고 허리가 숙여지려는 찰나, 막동은 퍼뜩 깨달았다. 어사는 안 숙이지.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슬금슬금 몸을 폈다.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깔아 보려 했으나 끝이 흔들렸다.
“…일어나거라.”
호방이 후다닥 일어섰다. 그러고는 허리를 접은 채 말을 쏟아 냈다. 빠르고 비굴했다.
“기별도 없이 이런 누추한 데를… 소인, 이 고을 호방이옵니다. 아까 그… 세 닢 어쩌고 한 건, 소인이 눈이 삐어서…”
막동이 턱을 슬쩍 들었다. 조금 맛을 들인 얼굴이었다.
“…하루에 열 번은 듣는다 했던가?”
호방의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내려갔다.
“아이고, 소인이 죽을죄를…”
장꾼들이 수군거렸다.
“…어사래.”
“저 꼴에?”
호방이 그 소리를 듣고 사방을 흘끗 살피더니 한 걸음 다가와 목소리를 죽였다.
“혹시… 풍곡현으로 가시는 길이옵니까?”
막동의 몸이 굳었다.
머릿속에 새벽 개울가가 스쳤다. 땋은 머리의 막동이 나리의 봉서를 두 손에 들고 한 자씩 더듬어 읽던 그 글자. 풍… 곡… 현.
막동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호방은 그 침묵을 ‘그렇다’로 알아들었다. 호방의 얼굴에 알겠다는 빛이 번졌다.
“보는 눈이 많사오니… 소인의 집으로 모시겠사옵니다.”
호방은 허리를 굽힌 채 구시렁댔다.
“이 누추한 주막에서 나리를 어찌 앉혀 드린다고… 집에 가면 갈비도 있고 전도 있는데… 아이고, 소인이 눈치가 없어서…”
그 순간 막동의 배에서 꼬르르르륵, 1화 때보다 훨씬 큰 소리가 났다.
주막 마당이 다시 한 번 조용해졌다. 아낙이 아이의 눈을 가린 채 아이의 귀까지 막았다.
막동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주모가 뚝배기를 내려놓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슬며시 입을 열었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다.
“…국밥값은요.”
호방이 화들짝 놀랐다. 허둥지둥 소매를 뒤져 엽전 한 줌을 꺼내더니 주모 손에 꾹 쥐여 주었다.
“거스름은 넣어 두시게.”
주모가 손바닥 위의 엽전을 내려다보고, 천천히 한 번 눈을 껌벅였다. 1화에서 보던 그 껌벅임이었다.
막동의 눈은 그 엽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호방이 무심코 쏟아 낸 한 줌이 막동이 반년은 구경도 못 할 돈이었다. 그는 꿀꺽 침을 삼키고 겨우 시선을 떼며 말했다.
“…앞장서라.”
2. 누가 앞장서나
호방이 앞서 걷고, 막동이 따라갔다. 장터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든 뒤에도 거리는 그대로였다. 호방보다 반걸음 뒤. 하인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걸으면 몸이 편했다. 막동의 발이 알아서 그 간격을 지켰다.
맞은편에서 등짐장수가 짐을 지고 오고 있었다. 골목이 좁아 둘이 엇갈리려면 한쪽이 비켜야 했다. 그 순간 막동은 아무 생각도 하기 전에 벌써 고개를 숙이고 담벼락에 몸을 붙였다. 길을 비켜 주는 몸짓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등짐장수가 외려 당황했다.
“아, 아이고, 예예…”
등짐장수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꾸벅하고 지나갔다.
그 사이 앞서 걷던 호방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호방은 막동이 반걸음 뒤가 아니라 아예 담벼락에 붙어 서 있는 걸 보았다. 호방도 얼른 몸을 비키며 두 손을 모아 앞길을 권했다.
“나리, 먼저…”
막동도 반사적으로 두 손을 내밀어 앞길을 권했다.
“아니, 너부터…”
둘이 마주 서서 서로 두 손으로 앞길을 가리켰다. 담벼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1초. 2초. 3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호방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막동도 제 손이 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호방이 먼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나리… 고개는… 숙이시는 게 아니오라…”
막동이 서둘러 손을 거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헛기침.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둘러댔다.
“…해가 눈부셔서 그런다.”
호방이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두껍게 끼어 해라고는 흔적도 없는 흐린 날이었다. 호방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러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는지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예, 예. 그러시겠지요.”
둘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막동이 앞이었다.
골목이 끝나자 다시 장터 샛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막동을 보고 슬금슬금 길을 비켰다. 호방이 미리 소문을 낸 모양이었다. 허리를 굽히는 이도,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다. 지나던 할머니는 기겁해서 막동에게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막동도 얼결에 마주 숙이려다가 멈칫했다. 허리가 반쯤 내려가다 도로 올라왔다. 다시 턱을 들어 보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숙이는 걸 그대로 받아 보았다. 어깨가 한 치쯤 펴졌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호방이 그 옆에서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저희 솔목은 참 조용한 고을이옵니다. 세곡도 꼬박꼬박 걷고, 장부도 깨끗하고…”
막동은 사람들이 숙이는 구경에 정신이 팔린 채 건성으로 되물었다.
“…장부?”
호방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장이 깨끗하다고요! 장터요, 장터!”
막동은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호방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숙인 머리들 너머, 장터 끝에 삿갓 하나가 서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 와중에 그 삿갓만은 숙이지 않았다. 막동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기와 얹은 담을 한참 따라가자 대문이 나왔다. 호방이 대문을 열고 비켜섰다. 막동의 걸음이 거기서 멎었다.
고개를 돌려 지나온 길을 보았다. 장터로 이어지는 흙길이 하얗게 뻗어 있었다. 저 길로 가면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다. 봉서도 마패도 아무 데나 던져 버리고… 막동은 대답 없이 길만 바라보았다.
“나리?”
그때 담 너머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훅 넘어왔다. 막동의 코가 먼저 대문 쪽으로 돌아섰다. 몸이 코를 따라갔다. 발이 문턱을 넘었다.
3. 고개 든 종놈
대문 안 마당에서 누렁이가 사납게 짖었다. 막동이 화들짝 놀라 도포 자락을 움켜쥐고 뒷걸음쳤다.
마당에는 하인 대여섯이 줄지어 엎드려 있었다. 이마가 흙에 닿도록 엎드린 가운데, 맨 끝의 한 놈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깨까지 엉킨 산발에 가는 콧수염,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었다. 그가 눈만 슬쩍 올려 누렁이를 흘겨보았다.
누렁이가 깨갱, 하며 꼬리를 말고 개집으로 숨었다.
그때 줄 가운데에서 물동이를 이고 가던 하인 하나가 막동을 보고 놀라 헉 하며 비틀거렸다. 물동이가 기울었다. 물이 쏟아지려는 찰나, 막동의 손이 먼저 나갔다. 동이를 받쳐 잡고 바로 세워 주었다.
“조심하…”
호방이 돌아보았다. 막동이 서둘러 손을 거두고 헛기침을 했다.
“…조심들 하거라.”
“송구하옵니다. 저것들이 배운 게 없어서.”
호방이 맨 끝 놈을 쏘아보았다.
“너는 왜 고개를 들고 있느냐!”
호방이 걷어차려 발을 번쩍 들었다. 구렁이가 고개를 들어 호방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발이 허공에서 멈췄다. 호방은 슬그머니 발을 내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치맛자락, 아니 도포 자락을 털었다.
“예이, 낮췄습니다요. 더 낮출 데가 없어서. …이히히.”
막동이 한 걸음 나섰다.
“…됐다.”
호방이 재빨리 비켜섰다.
“예예. 이놈이 눈치는 빠릅니다요. 나리 시중은 이놈이…”
“이름이…”
“구렁이올시다.”
“누가 네게 대답하랬느냐.”
“내가 물었다.”
호방이 입을 다물었다. 구렁이가 막동을 올려다보았다. 막동은 제 한마디에 사람이 멈춘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제 입을 제가 신기하게 느끼는 얼굴이었다.
구렁이가 사랑채 쪽으로 앞장서며 막동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틈에 막동만 들을 만큼 작게 말했다.
“…나리, 물동이 받는 솜씨가… 많이 받아 보신 손이오.”
막동의 걸음이 멎었다. 구렁이는 벌써 몇 걸음 앞서가고 있었다. 뒷모습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히히.”
4. 떠보는 상
해 질 녘, 사랑채에 상이 들어왔다.
고봉으로 쌓은 쌀밥, 뜨끈한 고깃국, 윤기가 좔좔 흐르는 갈비찜, 노릇노릇한 전. 막동이 침을 삼켰다. 체통이라는 것 때문에 숟가락을 들지도 못한 채 눈만 상 위를 오갔다. 호방이 상 앞에 엎드렸다. 문간에는 구렁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공하오나… 풍곡현엔, 무슨 일로 납시는지…”
막동의 눈이 호방에게 꽂혔다. 입이 먼저 열렸다.
“…너는 그걸 어찌—”
말끝을 삼켰다. 진짜 어사라면 묻지 않을 말이었다. 다행히 호방은 엎드려 있어 막동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막동은 턱을 들어 올렸다. 나리 흉내였다. 나리가 말씀하실 때의 그 눈썹, 그 낮은 목소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모르는 게 약이다.”
“아, 예예… 하오면 솔목은… 그저 지나가시는 길이시고…?”
막동의 눈은 갈비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으니, 먹고는 가야지.”
호방이 굳었다. 손이 저도 모르게 소매 속 묵직한 주머니로 갔다. 갈비에 꽂힌 막동의 눈, 소매 속을 만지작거리는 호방의 손. 호방이 쭈뼛쭈뼛 물었다.
“…얼마나… 드시면…”
막동이 갈비 접시를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있는 대로.”
호방의 입이 떡 벌어졌다. 1초. 그러다 각오한 얼굴로 소매에서 묵직한 엽전 꾸러미를 꺼냈다.
문간의 구렁이가 고개를 숙인 채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밥 얘긴데. 이히히.”
호방은 꾸러미를 움켜쥔 채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드셔야지요! 드시고말고요!”
그러고는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혹… 존함을 여쭈어도…”
“막…”
구렁이의 눈썹이 올라갔다. 막동이 제 입이 한 말을 알아채고 멈췄다. 눈동자가 상 위를 이리저리 훑었다.
“…막걸리는 없느냐?”
호방이 어리둥절했다가 손뼉을 쳤다.
“예? 아, 예예! 막걸리! 게 누구 없느냐, 막걸리 냉큼!”
호방이 다시 엎드렸다.
“하옵고… 존함은…”
막동이 숨을 골랐다. 숟가락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흰 도포, 피로 젖은 소매.
“…윤, 서, 겸.”
처음으로 나리의 이름을 제 입으로 빌렸다. 방 안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막동은 숨을 돌리려 갈비를 한입 물었다. 호방이 꾸러미를 쥔 채 비위를 맞추듯 바짝 다가앉았다.
“윤 나리… 고개 너머 그 종놈 말씀이온데. 저희 관아에서도 쫓고 있사옵니다.”
막동이 갈비에 사레가 들렸다. 컥, 컥. 호방이 등을 두드려 드릴까 손을 들었다가 도로 내렸다.
“어사 나리께서 그놈을 잡아 주시면, 솔목이 다 두 발 뻗고 자겠사옵니다.”
막동이 기침을 하는 사이 손이 저도 모르게 상투로 올라갔다. 땋았던 머리를 억지로 말아 올린 그 상투를 더듬었다.
“…자, 잡아야지.”
문간의 구렁이가 고개를 숙인 채 실눈을 떴다. 상투로 간 손을 보았다.
호방이 엽전 꾸러미를 상 곁으로 슬며시 밀었다.
“윤 나리… 이것도 같이 드시고… 솔목은 그저, 아무 일 없는 고을로 기억해 주시옵소서.”
막동의 눈은 갈비에 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고개만 끄덕였다. 호방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고, 편히 드시옵소서!”
호방이 뒷걸음질로 물러갔다. 꾸러미는 상 곁에 남았다.
5. 전 한 접시
호방이 나간 방에는 상 앞의 막동과 문간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구렁이뿐이었다.
막동은 상을 내려다보았다. 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노비는 늘 마지막에, 식은 밥을 먹었다. 이렇게 뜨겁고 기름진 상은 하루 종일 쳐다보기만 하다 물려 가던 것이었다. 눈은 상에서 떼지 못한 채 문간 쪽에 대고 물었다.
“…이게 다 내 것이냐.”
구렁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더 드실 분이 계시오?”
막동은 맞은편 빈자리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오래 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아니다.”
첫술을 떴다. 씹다가 멈췄다. 눈을 감았다.
그다음부터는 걷잡을 수 없었다. 밥을 퍼 넣고, 고깃국을 사발째 들이켜고, 갈비를 뜯었다. 종이 부엌 구석에서 남들 눈 피해 먹던 바로 그 속도였다.
문득 고개를 드니 문간의 구렁이가 고개를 든 채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막동은 볼이 미어진 채 굳었다. 입안의 것을 꿀꺽 삼키고 허리를 폈다.
“…에헴.”
꼴깍. 이번에는 구렁이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막동이 그것을 보았다. 상 앞에서 남이 먹는 걸 지켜보며 침을 삼키던 게 누구였는지, 막동은 안다. 1화 주막에서 나리가 국밥을 밀어 주던 그 자리, 그 눈이었다.
막동이 전 한 접시를 문간 쪽으로 쓱 밀었다.
“…먹어라.”
구렁이가 굳었다. 접시를 보고, 막동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이윽고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양반이 종놈한테 상을 나눠 주는 법은 없소.”
막동이 아차 싶어 턱을 들었다.
“…배가 불러 그런다.”
구렁이가 전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그 틈에 막동이 상 밑으로 수건을 폈다. 전 몇 쪽과 주먹만 한 밥 덩이를 싸서 소매 속에 밀어 넣었다. 종이 부엌에서 먹을 걸 챙겨 두던 손이었다. 우물거리던 구렁이가 실눈으로 그 소매를 곁눈질했다.
“배가 부르시다? 방금 그리 퍼 드시더니. 이히.”
막동이 소매를 슬그머니 내렸다. 구렁이는 더 묻지 않았다.
막동은 못 들은 척 고깃국을 마셨다. 사발 너머로 저도 모르게 낮고 느린 중얼거림이 샜다.
“…이런 걸 매일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겠지.”
구렁이가 전을 우물거리며 받았다. 끝에 가서 실눈을 떴다.
“있지요. 하루 세 끼, 뜨신 방, 비단 이불. …나리도 그리 사셨을 거 아니오?”
막동이 멈칫했다.
“…그,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1초. 구렁이가 우물거리던 입을 멈추고 막동을 빤히 보았다. 막동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갈비 한 대를 집어 들고 괜히 점잖게 말했다.
“…갈비는… 우리 집 게 더 연하지.”
그 갈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살이 사르르 녹았다. 너무 맛있어서 눈이 저절로 스르르 감겼다.
구렁이가 다시 우물거렸다. 느긋했다.
“…그러시겠지요. 이히.”
그때 안채에서 호방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구렁아!”
구렁이가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제 소매를 뒤져 삶은 계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막동의 밥그릇 옆에 말없이 놓고 나갔다. 아까 받은 전에 대한 답례였다. 말로는 하지 않았다.
6. 개가 짖는 밤
등잔 아래 장부를 펴 놓은 호방이 제 몫으로 따로 덜어 둔 갈비를 뜯고 있었다.
갈비를 문 채, 장부 사이에 끼워 둔 접힌 편지를 꺼내 다시 펴 보았다. 끝에는 「풍곡현 이방」 네 글자가 있었다. 호방의 입술이 글을 따라 움직였다.
“…어사 하나가 풍곡현으로 내려간다… 솔목을 지나거든 곧장 기별하라…”
편지를 접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방 어른 말씀 그대로구먼.”
편지를 장부 밑에 밀어 넣었다. 고개를 드니 방금 불러 놓은 구렁이가 어느새 방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호방이 갈비를 놓칠 뻔했다.
“기척 좀 내고 들라 했지.”
“냈소. 나리가 쩝쩝대느라 못 들으신 게지.”
호방이 헛기침을 하고 장부를 덮었다.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어사 나리는 뭐라시더냐? 뭘 물으시더냐?”
구렁이는 바닥에 낮게 앉은 채 느긋했다.
“갈비가 맛나다 하십디다. 이히.”
“그거 말고!”
“전도 맛나다 하시고오…”
호방이 답답해서 목소리가 커졌다가 얼른 낮췄다.
“이놈아! 곳간이나… 곡식 얘기는 없으시더냐?”
구렁이가 씩 웃었다. 말끝을 길게 늘여 올렸다 내렸다.
“그건 나리 하기에 달렸지요오. 그 어사 나리 길 시중… 제가 들겠소오.”
호방이 기가 막혀 갈빗대로 삿대질을 했다.
“네놈이? 어림없다! 어사 나리를 모시는 데도 법도가 있느니라. 걸음은 반걸음 뒤, 눈은 발끝, 입은…”
구렁이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을 받았다.
“닫고, 귀는 열고. 압니다요.”
말허리를 잘린 호방이 분해서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알긴 뭘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웃음은 삼키고, 옷고름은 바로, 신은 가지런히, 밥은 맨 나중에…”
갈비를 한입 뜯어 문 채 우물우물 잔소리를 이었다.
“특히 그 ‘이히히’는, 아주 그냥…”
구렁이는 귀만 후볐다. 후빈 손끝을 들여다보고 후 불었다. 호방의 잔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때 마당에서 개가 짖었다.
둘 다 그대로 굳었다. 2초.
구렁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귀를 후비던 새끼손가락으로 문밖을 찌르듯 가리켰다. 꿀 같던 목소리가 한순간 크고 높은 고함이 되었다. 개한테 하는 소리 같았지만 눈은 개가 아니라 호방의 턱수염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 이런 개똥덩이 같은 게 다 있어 그래~ 쫌!”
‘아~’를 길게 끌며 올라가고, ‘이런~’에서 한 번 더 끌었다. 호방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짖지 마! 시끄러~어~!!”
호방이 물고 있던 갈빗대가 입술 사이에서 가볍게 떨렸다.
“한 번만 더 짖어 댔다간 그냥 재갈 물려 버릴 거야~ 좀 하지 마~”
갈빗대를 가로로 물고 있던 호방이 슬그머니 갈비를 입에서 빼 내려놓았다.
“쓸데없는 소리… 털을 그냥 쭉~! 밀어 버릴라니까, 어?!”
‘쭉~!’에서 목소리가 가장 높았다. 호방이 두 손으로 제 수염을 감싸 쥐었다. 수염에 붙어 있던 밥알이 톡 떨어졌다. 마당의 개가 낑 하고 조용해졌다. 호방도 조용했다.
구렁이가 다시 능글맞은 반웃음으로 돌아보았다.
“개한테 한 소리요. 이히히.”
방금 하지 말라던 바로 그 ‘이히히’였다. 호방이 수염에서 손을 슬며시 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못 간다.”
구렁이가 바닥을 짚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시 꿀 같은 목소리였다.
“나리. 이 집 개밥 그릇만 십 년 닦았소. 이제 어사 나리 밥그릇 좀 닦아 봅시다.”
“못 간다니까.”
“종놈 바닥에도 법도가 있지요오. 주인 비밀을 많이 아는 놈이… 형님이오.”
말하는 사이 구렁이의 손이 어느새 상 위의 장부를 쓱 끌어당겼다. 호방이 수염을 움켜쥐었던 틈에 빼돌린 모양이었다. 호방이 놀라 장부 밑에 숨겨 둔 편지 위로 손바닥을 꾹 덮었다. 구렁이는 그 손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장부를 호방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곳간에 쌀이 몇 섬, 풍곡현으로 몇 섬… 그 어사 나리 귀에 한마디만 흘리면 어찌 되려나?”
호방이 문 쪽을 살폈다. 목소리를 확 낮췄다. 작고 느린 목소리였다.
“이, 이놈 봐라? 그러니까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게냐?”
구렁이가 씩 웃었다.
“협박이라니요. 나리는 위에 계시지. 장부도 위에, 쌀도 위에…”
호방이 구렁이를 노려보았다. 오래 노려보았다. 이를 악문 채, 얼굴만 상냥하게 펴졌다.
“…구렁아.”
“예이~”
“가거라. 너 같은 인재를 이 집에 썩히는 게 늘 아까웠느니라. 대신 어디 가시는지, 누굴 만나시는지 낱낱이 기별하거라. 풍곡현 가거든 이방 어른 댁으로 곧장 모시고.”
구렁이가 일어났다.
“멀리, 오래, 이방 어른 댁. 예이~ 이히히.”
문을 나가다 돌아보았다.
“장부는 잘 덮어 두시오. 개가 물어 갈라.”
문이 닫혔다. 호방은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려놓았던 갈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구나.”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 마당에 대고 낮게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
하인 하나가 쪼르르 달려왔다. 호방이 봉한 편지를 짓누르듯 쥐고 귓속말로 일렀다.
“발 빠른 놈 하나 대령해라. 오늘 밤 안으로 길을 떠나야 한다.”
7. 계란
등잔 하나가 방을 밝히고 있었다. 반쯤 빈 상, 밥그릇 곁에는 구렁이가 두고 간 계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막동이 그것을 보았다. 손이 멈췄다.
머릿속에 1화의 주막이 떠올랐다. 계란 얹은 국밥 그릇을 말없이 밀어 주던 나리의 손.
“먹기나 해라.”
막동은 계란을 집어 맞은편 빈자리에 놓았다. 누가 밥을 먹으면 먼저 챙기던 손버릇이었다. 1초. 피식 웃고 도로 집어 왔다.
그러고는 빈자리에 대고, 들뜬 하인 말투로 말했다.
“나리, 보십쇼. 고깃국에… 계란까지 나옵니다요. 이히—”
구렁이의 웃음을 따라 한 것이 스스로 우스워 킥킥거렸다. 계란을 크게 베어 물었다. 볼이 빵빵한 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웃다가 손에서 남은 계란이 톡 떨어졌다. 상 밑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막동이 상 밑으로 몸을 숙여 더듬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숙인 등과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오래 들썩였다. 주운 계란을 소매로 닦다가, 통째로 입에 밀어 넣었다.
얼굴을 들었다. 입안 가득 계란이었다. 막동은 입을 벌린 채 울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입이 막혀 꺽꺽 샜다. 눈을 꽉 감았다. 눈썹 안쪽이 올라갔다. 볼이 미어지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러 턱까지 내렸다. 계란을 씹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저 소리 죽여 울었다.
문간에는 호방의 방에서 돌아온 구렁이가 서 있었다. 무어라 말하려다 그 얼굴을 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졌다. 구렁이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8. 엿들은 기별
비단 이불 위에 누운 막동의 몸이 푹 꺼졌다. 뒤척였다. 또 뒤척였다. 이렇게 폭신한 자리에서는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이불을 개켜 두고 문간 맨바닥으로 갔다.
소매에서 낮에 싼 수건 보따리를 꺼냈다. 상에 남은 갈비 한 대를 더 얹어 단단히 묶고 머리맡에 두었다. 신발은 문 앞에 가지런했다. 새우잠 자세로 누웠다. 새벽에 몰래 뜰 셈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품에서 봉서와 마패를 꺼냈다. 1화 새벽 고갯길에서 ‘설마’ 하며 내려다보던 그 둘이었다. 등잔 빛에 마패의 말들이 어른거렸다. 머리맡에는 나리의 갓이 놓여 있었다. 찌그러진 갓이었다.
“…이걸 지니면… 나리처럼 되는 거지요.”
작게, 갓에 대고 중얼거렸다. 갓은 대답이 없었다. 막동은 봉서와 마패를 도로 품에 넣고 보따리를 끌어안았다.
“…날 새면 뜹니다. 용서하십쇼, 나리.”
새우잠으로 돌아누웠다.
그때 창호지 너머 마당에 그림자 둘이 비쳤다. 호방과 심부름꾼이었다. 호방이 봉한 편지를 건네며 목소리를 죽였다.
“풍곡현 이방 어른께. 어사가 내일 들어간다고 일러라. 우리 고을은 그냥 지나간다고. 이름은… 윤서겸.”
심부름꾼이 밤길로 뛰어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막동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나리 가시는 데를… 저놈들은 미리 알고 있었어.”
귓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1화, 피가 번진 나리의 마지막 한마디.
“그놈들이 찾는 건… 내가 아니다.”
막동이 숨을 삼켰다. 입술이 떨렸다.
“…그래서… 고개에서 기다린 거야.”
막동이 머리맡의 보따리를 보았다. 그다음 나리의 갓을 보았다. 보따리를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 두고, 무릎걸음으로 갓 앞에 가 앉았다. 갓을 바로 놓으려는 손이 떨렸다. 작게 말했다.
“손이 이렇게 떨리는데요, 나리…”
찌그러진 갓을 두 손으로 바로 놓았다.
“…가 볼랍니다. 누가 알고 있었는지. …나리가 왜 그리 되셨는지.”
그때 문이 스르르 열렸다. 구렁이가 고개만 쑥 들이밀었다. 막동이 화들짝 놀라 갓에서 손을 뗐다.
“안 주무시오?”
“…무슨 일이냐.”
“내일 새벽 길 떠나신답디다. 나도 따라가오. 이히히.”
막동의 눈이 밀어 둔 보따리로 갔다. 여차하면 뜰 길도 막혔다.
“…네가 왜?”
“호방 나리가 보내 줍디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문이 닫혔다. 막동은 닫힌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9. 두 종놈의 길
셋째 날 새벽, 호방 집 대문 앞에는 서리 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나서는 막동을 호방이 쫓아와 엽전 꾸러미를 소매에 쑤셔 넣었다.
“나리, 이걸 두고 가셨사옵니다! 길 시중은 이놈이 들 것이옵니다.”
호방은 막동이 돌아선 틈에 구렁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방 어른 댁이다. 알지?”
구렁이가 크게 대답하고, 작게 덧붙였다.
“예이~ …이히히.”
대문을 벗어나 걸으며 막동이 물었다.
“뭐라더냐.”
“나리 말씀 잘 들으라 합디다.”
고갯길이었다. 막동이 앞서 걸었다. 턱을 들고, 걸음은 느릿느릿. 구렁이가 봇짐을 지고 반걸음 뒤를 따랐다.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막동의 손이 저도 모르게 뒤로 갔다. 구렁이 어깨의 봇짐을 받아 제 등에 척 올려 메고, 몇 걸음을 성큼성큼 올랐다. 짐은 늘 막동이 졌으니 몸이 먼저 알고 움직인 것이었다.
빈손이 된 구렁이가 눈을 끔벅였다.
“…나리.”
막동이 멈췄다. 제 등의 봇짐을 내려다보았다.
“…등이 허전해서 그런다.”
구렁이가 봇짐을 도로 받아 멨다. 실눈을 떴다.
“등이 허전하시다? …이히.”
그때 맞은편에서 지게꾼이 내려왔다. 막동이 반사적으로 길가로 비켜서서 허리를 굽혔다. 갓 쓴 양반이 먼저 굽히자 지게꾼이 기겁해 더 깊이 굽혔다. 막동이 지지 않고 더 굽혔다. 구렁이도 얼결에 따라 굽혔다. 셋이 좁은 길 가운데서 서로 숙인 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로 닭 한 마리가 유유히 걸어 지나갔다. 모가지를 쭉 빼고, 볏을 흔들며,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구렁이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나리, 이 길에선 저 닭이 제일 양반이오.”
지게꾼이 허둥지둥 지나간 뒤였다. 막동이 갓을 바로 쓰며 구렁이를 흘겨보았다. 짜증이 섞였다.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구렁이가 고개를 까딱하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밥은 굶어도 눈치는 안 굶는 게… 나 구렁이야아~”
짧은 숨.
“이히히히히…”
눈이 초승달처럼 휘고, 입이 귀에 걸리고,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 전체가 구겨지도록 웃는 웃음이었다.
막동은 어이없어 쳐다보다 문득 ‘눈치’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놈이 어디까지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꾼 둘이 짐을 지고 지나가며 수군댔다.
“그 땋은 머리 종놈 말이야, 잡으면 쌀이 열 섬이래.”
막동의 손이 저도 모르게 상투로 갔다. 상 앞에서 하던 바로 그 손버릇이었다. 구렁이가 실눈을 떴다.
“나리, 상투가 삐죽하오. 이히.”
막동이 비죽 나온 머리칼을 쑤셔 넣었다. 구렁이의 웃음이 멎었다.
“…근데 나리. 그 땋은 머리 종놈이… 혹시…”
막동이 얼어붙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둘이 마주 보았다. 바람이 지나갔다.
구렁이가 다시 씩 웃었다.
“…알 게 뭐요. 이히히.”
구렁이가 앞서 걸었다. 막동은 한참 그 등을 바라보다 따라갔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장승 하나가 서 있었다. 비바람에 깎인 얼굴 밑에 패인 글자가 있었다. 막동이 손가락으로 한 자씩 짚어 보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풍, 곡, 현.
아래로 말라붙은 논이 내려다보였다. 쩍쩍 갈라진 논바닥, 내려앉은 초가, 멀리 관아 지붕. 북소리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가 아득히 올라왔다.
“이름은 풍년인데 논바닥은 흉년이네.”
구렁이가 중얼거렸다.
같은 아침, 풍곡현 이방의 방이었다.
밤새 달려온 심부름꾼이 숨을 헐떡이며 엎드려 있었다. 이방이 솔목 호방의 편지를 펴 읽었다. 「어사 윤서겸」. 피식 웃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 편지를 접으려다 손이 멈췄다.
이방이 서랍을 열어 접어 둔 쪽지 하나를 꺼냈다. 한양에서 온 것이었다. 반만 펴자 첫 줄만 보였다.
「고개의 일은 끝났다.」
아래 줄은 접힌 채였다. 이방은 편지와 쪽지를 나란히 놓고 내려다보았다. 웃음기가 가셨다. 낮게 읊조렸다.
“…윤서겸은 죽었다.”
1초.
“그럼… 저건 누구냐.”
고개 마루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동이 갓끈을 고쳐 맸다. 턱 밑에서 매듭을 꼭 조였다. 숨을 한 번 깊이 쉬고 풍곡현을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구렁이가 그 뒤를 따랐다.
다음 화 「고개를 들라」
덧붙임. 먼지 위의 세 글자
과거, 윤서겸 집의 어느 낮.
서재 안으로 늦은 햇살이 비스듬히 들었다. 윤서겸이 서안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낮게 읽는 소리가 방 안에 고였다.
어린 막동이 빗자루를 들고 서재를 쓸고 있었다. 쓸다가 멈췄다.
막동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방바닥에 얇게 쌓인 먼지 위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삐뚤빼뚤, 한 획씩. 책 읽는 소리가 멎었다.
“무엇을 쓰느냐.”
막동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바닥으로 지우려 했다.
“두어라.”
윤서겸이 서안에서 일어나 다가와 내려다보았다. 먼지 위에 삐뚤빼뚤한 글자가 있었다.
“나리 성함입니다요.”
“읽어 보거라.”
“윤… 서… 겸.”
막동이 제대로 읽었는지 눈치를 보았다. 윤서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네 이름은 쓸 줄 아느냐.”
“…그건 아직 못 배웠습니다요.”
윤서겸이 잠시 막동을 보았다. 말없이 서안으로 돌아가 종이 한 장과 붓을 가져와 아이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부터 배워라.”
막동이 붓을 받았다. 늘 빗자루만 쥐던 손에 붓이 어색했다. 손가락이 붓대 위에서 길을 잃었다. 윤서겸이 그 곁에 앉았다. 흰 도포 자락이 먼지 낀 바닥에 놓였다.
작은 아이와 큰 사람이 나란히 앉은 모습에서, 햇살이 천천히 기울었다.
끝.
가짜 어사 —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 및 삼정(三政) 문란 고증 노트
- 암행어사 임명장 세트(봉서·사목·마패·유척): 어사로 임명된 당하관 문신은 승정원에서 봉서(封書: 출두할 고을 지명이 적힌 밀봉 문서), 사목(事目: 감찰 수칙서), 마패(馬牌: 역마 징발패), 유척(鍮尺: 도량형 및 형구 검수용 놋쇠 자)을 하사받았다.
- 봉서 개봉 원칙(남대문 밖 개봉): 봉서 겉면에는 '도성 문(숭례문 등) 밖에서 개봉할 것'이 명기되어, 어사 본인도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암행 목적지(경기 풍곡현)를 알지 못했다.
- 세곡(稅穀) 수탈과 되·말(斗斛) 조작: 조선 후기 지방 아전(호방·이방)들은 세곡 수납 시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큰 되를 사용해 백성들의 쌀을 초과 징수(모곡)하고, 어사 감찰 시에는 정상 규격의 되로 바꿔치기해 유척 검수를 피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