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어사
Novel / 가짜 어사 · 무료 공개

제5화. 되

EPISODE 05 /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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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역사 고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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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증 ↓

다섯째 날 한낮, 풍곡현 장터는 장날인데도 찬 바람만 휑하게 불었다.

흰 도포 차림으로 장터 어귀를 걷던 막동의 발걸음이 곡식전 앞에 멈춰 섰다. 장판 위에 벌려 놓은 멍석마다 쭉정이 섞인 보리와 메마른 조만 몇 줌씩 올라와 있을 뿐, 성한 흰쌀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막동의 머릿속에 어젯밤 동헌 잔치판에서 돌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노랫가락이 다시 울렸다.

‘관아 말은 무슨 말인가, 부어도 부어도 안 차네.’

사흘 전 아침, 관아 대문 앞에서 사령의 발길질에 나뒹굴던 백발 노인의 터진 쌀자루와 빈 그릇을 들고 울던 손녀의 얼굴이 눈앞에 겹쳐졌다. 동헌 마당에 끌려 들어와 이방이 바꿔치기한 새 흰 나무 말을 보며 “이 말이 아니온데……” 하고 중얼거리다 사령의 눈초리에 입을 다물던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었다.

‘관아의 말과 되는 분명히 크다.’

십 년 동안 주인집 곳간과 장터를 오가며 수없이 곡식 가마니를 지게에 지어 나르고 말과 되로 쌀을 깎아 본 막동의 몸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관아 대문 앞에서 노인의 곡식을 평미레로 깎던 그날 아침, 말 안쪽 깊이를 더듬었던 손가락 끝의 감각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헌에서 이방 놈이 내놓은 것은 테두리가 반듯한 새 흰 관두(官斗)였다. 그 자리에서 “이건 아까 그 말이 아니다”라고 우겨 보았자 증거가 없으니 어사 체면만 구길 뿐이었다.

지금까지 막동이 어사 흉내를 낸 것은 오로지 도망 노비로 잡혀 죽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젯밤 차일 막대에 맞아 피를 흘리던 돌이를 업고 돌아온 뒤로,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내려앉아 있었다.

“……찾아야겠다.”

처음으로 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쌀과 남의 눈물을 위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객사 마당으로 돌아온 막동은 부엌 아궁이 앞에서 땔감을 패고 있는 돌이에게 슬쩍 다가갔다. 어젯밤 매를 맞은 어깨가 아직 욱신거리는지 돌이가 찡그린 얼굴로 도끼자루를 고쳐 쥐고 있었다.

“돌이야.”

“아이고, 어사 나리! 부르셨사옵니까요!”

돌이가 화들짝 놀라 도끼를 내려놓고 흙 묻은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다. 막동은 사방을 한 번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 관아에서 백성들한테 거둔 세곡 가마니와 말, 되 같은 것들은 다 어디에 두느냐?”

“동헌 뒤편 내아(內衙)를 지나면 북쪽 담장 끝에 큰 세곡 창고가 있사옵니다. 거기 안쪽 헛간에 묵은 말과 되를 다 모아 두는뎁쇼……”

돌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층 더 작게 속삭였다.

“하온데 그 창고는 이방 어른 허락 없이는 아전들도 못 들어가옵니다. 밤마다 창고지기 영감이 횃불을 들고 자정 무렵에 한 번씩 순찰을 돌고요.”

‘북쪽 담장 끝 세곡 창고라.’

막동은 돌이의 다친 어깨를 가볍게 한 번 두드려 주고는 객사 방으로 들어섰다.

해가 저물고 객사 방에 등잔불이 켜졌다.

문간을 지키던 구렁이는 어디로 마실을 나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막동은 방문을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근 뒤, 방 한구석에 놓인 나무 책 상자 뚜껑을 열었다.

어젯밤 이방이 보낸 사령이 샅샅이 뒤지고 간 상자 맨 바닥에, 검은 놋쇠로 만든 넓적하고 긴 자 하나가 덩그러니 굴러다니고 있었다. 사령 놈조차 그저 볼품없는 쇠막대기인 줄 알고 도로 던져 두고 간 물건—암행어사의 네 가지 성물 중 하나인 유척(鍮尺)이었다.

막동은 묵직한 유척을 두 손으로 집어 등잔불 가까이 가져갔다.

차가운 놋쇠 표면 위로 자잘한 눈금들과 네모난 한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까막눈인 막동의 눈에는 그저 지렁이가 기어가는 무늬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리…… 이걸로 어찌 재야 저 도적놈들 입을 틀어막을 수 있습니까요.”

막동이 엄지손가락으로 유척의 옆모서리에 파인 깊은 홈을 쓸어내리는 순간, 한양을 떠나기 며칠 전 나리의 서재에서 보았던 풍경 하나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 밤, 등잔불 아래 앉은 윤서겸이 바로 이 놋쇠 자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불을 지피고 들어와 기웃거리던 막동에게, 윤서겸은 유척 옆면의 꺾인 마디와 홈을 손끝으로 짚어 보이며 나지막이 말했었다.

‘막동아. 고을마다 아전들이 되와 말의 배를 불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다. 글자를 몰라도 이 놋쇠 자의 큰 마디 하나가 관두(官斗)의 안쪽 깊이요, 작은 마디 하나가 되의 높이다. 이 마디를 넘어서면 그것이 곧 도둑의 되니라.’

생전 나리가 왜 까막눈인 종놈에게 그런 말을 흘리듯 일러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막동의 손끝이 유척 옆면에 새겨진 굵은 기준 홈 두 개를 정확히 찾아냈다. 글자는 몰라도 눈대중과 손끝의 감각만은 평생 지게를 지고 곡식을 다루며 단련된 노비의 손이었다.

막동은 놋쇠 유척을 도포 품속, 나리의 봉서 바로 옆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풍곡현 관아는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검은 구름이 반달을 가린 틈을 타,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막동이 발소리를 죽여 동헌 뒤편 북쪽 담장 그늘을 따라 움직였다. 낮에 돌이가 일러 준 대로 내아 뒷담을 돌아 나가자, 굵은 통나무 기둥을 세운 거대한 세곡 창고가 어둠 속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듯 버티고 서 있었다.

다행히 창고 옆문 나무 빗장은 반쯤 헐겁게 걸려 있었다.

막동은 단검 대신 아궁이 옆에서 주워 온 납작한 쇠꼬챙이를 문틈에 밀어 넣어 달그락 소리도 없이 빗장을 들어 올렸다.

삐거덕.

좁은 문틈으로 몸을 미끄러뜨려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묵은 볏짚 냄새와 서늘한 쌀겨 냄새가 코끝을 훅 덮쳤다.

창고 안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천장까지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세곡 가마니들이 거대한 미로처럼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막동은 손바닥으로 거친 가마니 표면을 더듬으며 창고 가장 깊숙한 안쪽 헛간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겼다. 사흘 전 동헌 마당에서 이방이 눈짓으로 빼돌린 그 ‘진짜 말’이 있다면 반드시 이 창고 맨 구석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가마니 더미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안쪽 헛간으로 발을 들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툭!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단단한 어깨가 막동의 가슴팍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헉—!”

막동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상대의 손이 번개처럼 날아와 막동의 입을 틀어막았다. 막동 역시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사령 같은 거친 사내의 손이 아니었다. 작지만 무쇠처럼 단단하게 단련된 여자의 손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윤곽—어젯밤 동헌 잔치판 구석에서 술병을 나르던 그 관비 차림의 여자였다!

‘이, 이 여자가 왜 이 한밤중에 세곡 창고에……?!’

두 사람이 숨 막히는 대치를 벌이던 찰나, 창고 바깥 마당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붉은 횃불 불빛이 창고 문틈으로 어른거렸다.

“에구, 날도 추운데 무슨 놈의 순찰을 밤마다 돌라 하시는지……”

투덜거리는 창고지기 영감의 목소리와 함께 창고 정문 자물쇠가 덜컹거렸다.

막동과 여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동시에 커졌다. 지금 여기서 들키면 어사고 나발이고 밤도둑으로 몰려 끝장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바로 옆에 산처럼 쌓인 세곡 가마니 더미 뒤쪽의 좁은 틈새로 몸을 날렸다.

어른 둘이 들어가기엔 턱없이 비좁은 틈이었다. 막동이 벽 쪽으로 등을 바싹 붙이자, 여자가 막동의 가슴팍 코앞까지 바짝 밀착해 쭈그리고 앉았다. 여자의 옷자락에서 풍기는 서늘한 밤공기 냄새가 막동의 코끝을 스쳤다.

끼이익—

창고 정문이 열리고 창고지기 영감이 횃불을 높이 치켜든 채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타닥거리는 횃불 소리가 가마니 더미 사이를 따라 점점 가까워졌다. 막동은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제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숨을 참았다. 바로 코앞에 붙어 앉은 여자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막동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창고지기의 횃불이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가마니 더미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가마니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 주홍빛 불빛이 막동의 얼굴 위를 대낮처럼 비추었다.

여자의 시선이 불빛에 드러난 막동의 오른쪽 눈썹 위 짧은 흉터에 정확히 꽂혔다.

창고지기가 하품을 하며 입구 쪽으로 다시 멀어지고 창고 문이 닫히자, 막동이 참았던 숨을 “푸하……” 하고 길게 내쉬며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바람에 막동의 윗입술 사이로 삐뚤어진 왼쪽 송곳니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눈썹 위의 짧은 흉터, 그리고 웃을 때 드러나는 삐뚤어진 왼쪽 송곳니.

여자의 동공이 한순간 날카롭게 수축했다.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몸을 빼내더니, 반쯤 열린 옆문 틈을 통해 어둠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뭐야, 대체 누구지?”

얼떨떨하게 가슴을 쓸어내린 막동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안쪽 헛간 구석에 쌓인 묵은 짚단 더미를 헤집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짚단 맨 밑바닥에 엎어 놓은 낡은 나무 궤짝 안에서 검고 손때에 절은 나무 말(斗) 하나와 옆구리가 불룩한 큰 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동이 숨을 삼키며 그 나무 말을 끌어냈다.

테두리 한 귀퉁이가 이 빠지듯 떨어져 나간 자국—사흘 전 아침 관아 대문 앞에서 백발 노인의 곡식을 재던 바로 그 말이었다!

막동은 떨리는 손으로 도포 품속에서 놋쇠 유척을 꺼내 들었다.

생전 윤서겸 나리가 일러 주었던 대로 유척을 세워 나무 말의 안쪽 바닥부터 테두리까지 깊이를 재어 보았다.

놋쇠 자 옆면에 파인 관두(官斗)의 법정 기준 홈이 말 테두리보다 무려 한 치(寸) 가까이 아래에 잠겨 있었다. 옆에 있던 큰 되 역시 유척의 작은 마디 기준선을 훌쩍 넘어섰다. 한 말에 쌀 두 되씩은 족히 더 들어가는 도둑의 말이었다!

“……크다.”

어둠 속에서 유척과 이 빠진 나무 말을 꽉 움켜쥔 막동의 눈빛이 타오르듯 빛났다.

“이 도적놈들…… 진짜로 컸어!”

같은 밤이 지나고 새벽녘, 풍곡현에서 북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은 산자락 아래 주막.

닷새 전 저녁, 윤서겸과 막동이 마지막으로 국밥을 마주 앉아 먹었던 바로 그 주막이었다.

아직 장꾼들이 들기 전인 이른 새벽, 주막 안쪽 평상에 관비의 허름한 치마저고리를 벗고 남색 쾌자에 패랭이를 눌러쓴 젊은 여자—한양 포도청 다모(茶母) 단이가 앉아 있었다.

단이는 아궁이 불을 지피던 주모에게 엽전 몇 닢을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아주머니. 닷새 전 비 오던 날 저녁에, 여기서 국밥을 드시고 밤고개로 올라갔다던 그 선비님 말이에요. 그날 밤 고개 비탈에서 변을 당하셨잖소.”

오른쪽 콧방울 아래 작은 점이 있는 주모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혀를 찼다.

“아이고, 말도 마슈. 그렇게 점잖은 선비님이 어쩌다 그런 험한 변을 당하셨는지…… 그날 내가 밤엔 고개 넘지 말라고 그리 말렸건만.”

단이의 서늘한 눈빛이 주모를 향했다.

“그 선비님이 데리고 다녔다던 하인 말이에요. 생김새가 어땠소?”

주모는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손짓을 섞어 가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 선비님 하인? 나이는 스물다섯쯤 됐을까, 등 뒤로 땋은 머리에 산더미 같은 지게를 지고 다녔지. 아, 선비님이 자기 국밥 그릇에 든 삶은 계란을 밀어 주니까 입이 귀에 걸려서 헤헤 웃는데…… 웃을 때 왼쪽 송곳니가 비죽이 삐뚤어져 있었고, 오른쪽 눈썹 바로 위에 짧은 흉터가 하나 있었수다.”

단이의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

조금 전 풍곡현 관아 세곡 창고의 가마니 더미 뒤, 횃불 불빛 속에서 마주 보았던 ‘암행어사 윤서겸’의 얼굴과 한 치도 틀리지 않는 인상착의였다.

주모가 부엌으로 돌아간 뒤, 홀로 남은 단이는 천천히 품속에 손을 넣어 작은 물건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 비가 그친 밤고개 진흙탕에서 이름 없는 선비의 시신을 수습할 때, 그 시신의 허리띠에 매달려 있던 물건이었다.

단이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칼날이 아닌 힘에 의해 거칠게 뜯겨 나간, 절반쯤 끊어진 쪽빛 명주 끈 토막이었다.

창고 어둠 속에서 스치듯 보았던 가짜 어사의 도포 품, 구리 마패 윗구멍에 대롱거리던 그 쪽빛 끈의 나머지 반쪽과 똑같은 빛깔이었다.

새벽 등잔불을 바라보는 단이의 차가운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찾았다, 종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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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CAL VERIFICATION · 정조 18년 (1794) 사료 고증

가짜 어사 — 조선 후기 암행어사 제도 및 삼정(三政) 문란 고증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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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행어사 임명장 세트(봉서·사목·마패·유척): 어사로 임명된 당하관 문신은 승정원에서 봉서(封書: 출두할 고을 지명이 적힌 밀봉 문서), 사목(事目: 감찰 수칙서), 마패(馬牌: 역마 징발패), 유척(鍮尺: 도량형 및 형구 검수용 놋쇠 자)을 하사받았다.
  • 봉서 개봉 원칙(남대문 밖 개봉): 봉서 겉면에는 '도성 문(숭례문 등) 밖에서 개봉할 것'이 명기되어, 어사 본인도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신의 암행 목적지(경기 풍곡현)를 알지 못했다.
  • 세곡(稅穀) 수탈과 되·말(斗斛) 조작: 조선 후기 지방 아전(호방·이방)들은 세곡 수납 시 법정 규격보다 배가 부른 큰 되를 사용해 백성들의 쌀을 초과 징수(모곡)하고, 어사 감찰 시에는 정상 규격의 되로 바꿔치기해 유척 검수를 피하려 했다.